제주의 밤을 잘 보려면 구도심부터 걸어야 한다. 제주시청에서 탑동, 동문시장, 삼도, 이도, 노형의 경계까지, 밤 10시 이후 불이 꺼지지 않는 가게들이 듬성듬성 이어진다. 자동차로 휙휙 옮겨 다니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른다. 나는 대개 버스나 도보로 이동한다. 간판의 불빛, 포장마차의 구수한 증기, 바람에 실려오는 멸치육수 냄새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 동네의 심야는 번쩍이는 번화가가 아니라, 짧은 밤을 부지런히 붙잡는 사람들의 작은 조도에서 결정된다.
이 글은 최근 1년 사이에 여러 차례 밤을 새며 정리한 동선과 식당, 사케바의 기록이다. 관광객도 쓸 수 있지만,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제주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풍경이 배경이다. 영업시간은 계절과 요일에 민감하다. 24시까지 열던 가게가 22시에 닫는 일이 흔하고, 비상시에는 아예 쉬기도 한다. 가게 이름은 적지만, 굳이 외우기보다 동선을 기억해 두면 비슷한 결과를 얻는다. 구도심의 심야는 메뉴보다 맥락이 맛을 만든다.
심야가 어울리는 동선
나는 저녁 9시쯤 동문시장 근처에서 출발해 탑동 방파제를 찍고, 다시 시청로로 되돌아오는 편을 선호한다. 이 동선이면 해산물로 시작해 라멘이나 야키토리 같은 술안주, 새벽의 국물까지 무리 없이 연결된다. 바람이 강하면 탑동은 피하고, 그럴 때는 삼도동 뒷골목으로 좁혀서 실내 위주의 동선을 짠다. 비가 오면 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가게를 골라 점프하듯 이동한다. 대중교통 막차를 놓치더라도 심야 택시는 10분에서 25분 사이 대기하면 잡히는 편이다. 다만 금요일과 토요일 자정 전후에는 30분 이상을 잡아먹는다. 숙소가 애월이나 함덕이면 귀가 시간부터 거꾸로 계산해야 한다.
동문시장, 포장마차의 온도
밤 9시의 동문은 낮과 다르다. 기념품 가게는 문을 닫고, 반쯤 닫힌 셔터 사이로 회 냄새와 전기 그릴의 고온이 기어 나온다. 관광객이 몰리는 핫한 집은 21시 이전에 피크가 지나고, 22시가 가까워지면 주변 상인들이 들어와 빌려 먹는다. 이때가 좋다. 눈치 보지 않고 반 접시를 주문해도 웃으며 내준다.
대방어와 자리돔 철이 바뀌는 늦가을에는 가격과 상태가 하루 단위로 출렁인다. 활어회를 집요하게 고집하기보다, 그날 손질을 잘한 숙성 회를 고르길 권한다. 숙성 1일 차 부위는 살짝 단단하고, 2일 차면 지방이 올라와 젓가락에 달라붙는다. 포장마차 주인에게 오늘 가장 많이 나간 부위를 묻고, 반 접시만 받아서 간장과 와사비를 얹어 본다. 수분이 덜 빠졌다면 김 한 장에 무순과 함께 말아먹으면 입 안에서 균형이 맞는다. 소주 대신 가벼운 니혼슈를 가져왔다면, 여기서 첫 잔을 연다. 제주에서는 외부 주류 반입이 까다롭지 않은 포장 구역도 있다. 다만 자리비움이 잦은 시간대에는 잔을 들고 배달 상자 사이에 서서 마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회보다 낙지볶음이나 오징어 통구이를 고를 때는 철판의 색을 본다. 오래 쓴 철판은 표면이 고르게 검게 코팅돼 있는데, 이게 음식에 일정한 열을 준다. 표면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판은 기름이 고여 식감이 울퉁불퉁하다. 맛은 미세한 디테일에서 벌어진다. 동문에서는 이런 차이를 밤에 더 선명하게 느낀다. 낮의 북적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집중이 생기기 때문이다.
탑동 방파제, 바람과 잔의 무게
탑동은 곳곳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밤 10시 이후에도 사람의 체온이 남는다. 마주 보고 앉아 병째로 마시기보다, 따뜻한 음식을 곁들여 잔의 흐름을 늦추는 쪽이 안전하다. 라면이나 어묵 국물을 테이크아웃하는 키오스크가 드물게 늦게까지 운영한다. 23시 이후에는 운에 기대야 하니, 미리 사 두는 편이 낫다.
바람이 센 날에는 와인잔처럼 얇은 도수를 피하고, 도톰한 유리컵이나 온더락 잔이 낫다. 사케를 가져왔다면 10도 전후의 라이트한 준마이긴조가 들고 다니기 좋다. 과실향이 뚜렷한 병은 바람 냄새와 충돌해서 쓴 맛이 두드러질 수 있다. 나는 300ml 소용량을 권한다. 마시다 남겨도 미련이 적고, 다음 스폿에서 새 병을 열기 쉽다. 제주 밤의 매력은 한 병과 끝내지 않는 데 있다.
구도심 사케바의 방식
제주 구도심의 사케바는 도쿄의 이자카야처럼 조직적이지 않다. 사케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서너 곳 있고, 그 밖에 양주 바에서 사케를 보조로 구성하거나, 야끼토리집이 적극적으로 병을 들여놓는 정도다. 오히려 이 산만함이 매력이다. 바텐더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병의 구성과 안주 조합이 가게마다 확실히 다르다.
한 곳에서는 홋카이도산 쌀을 강조하고, 다른 곳에서는 효고의 탄광수로 빚은 묵직한 준마이를 내세운다. 제주 손님들은 과일향이 분명한 긴조 스타일에 호응하는 편인데, 밤 11시 이후에는 확실하게 드라이한 병이 회전이 빠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 많은 꼬치와 튀김, 한국식 간장 양념이 야간 메뉴의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단맛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줄어든다.
시청로와 삼도동, 불이 꺼지지 않는 뒷골목
시청로 골목으로 들어가면 야끼토리 간판이 먼저 눈에 띈다. 연탄향을 탄탄히 실은 가게들이 주로 23시까지, 주말에는 24시까지 굽는다. 예약 없이 들어가면 카운터석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첫 주문은 염통과 다리살, 닭껍질로 가볍게 묶고, 간장과 소금 간을 적절히 섞는다. 초심자일수록 소금의 장점을 늦게 깨닫는다. 새벽에는 소금이 직설적이라 술과 싸우지 않는다. 여기에 어른 손톱만 한 크기로 자른 감태를 얹으면, 도수 높은 준마이에도 쿰쿰한 향이 남지 않는다.
삼도동 뒷골목에는 규모가 작은 사케바가 있다. 병이 20종 내외로 정갈하게 놓여 있고, 메뉴판에는 간결한 설명 두세 줄만 있다. 이런 집에서 메뉴의 글자 수는 자신감의 역설이다. 글이 짧을수록 병의 컨디션 관리가 좋다. 냉장고 문이 자주 열리고 닫힐수록 바틀의 표정이 흔들리는데, 정리된 바는 이 점을 알기 때문에 안주도 간결하다. 관자 버터 소테, 고등어 절임, 모둠 쓰케모노. 화려한 튀김이 없는 대신 온도와 소금의 배합이 안정적이다.
바텐더가 권하는 페어링에서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말고, 두 잔 정도는 역방향으로 시도해 보자. 이를테면 고등어 초절임에 사과향이 나는 긴조를 붙이는 대신, 미묘한 쓴맛이 감도는 드라이 준마이를 올려 본다. 기름진 산미가 아닌 예리한 산도로 생선의 철향을 누르는 방법이다. 실패하면 다음 잔에서 수습하면 된다. 사케 투어의 재미는 한 잔짜리 조정권을 손에 쥐는 데 있으니, 가지런한 교과서 페어링만으로 밤을 묶어두지 말자.
늦게 먹는 라멘의 기준
자정 무렵의 라멘은 판단력을 무디게 한다. 제주 구도심에는 탄탄멘과 쇼유를 함께 내는 집이 몇 군데 있다. 국물의 염도는 보통 0.9에서 1.2% 사이인데, 밤에 먹을 때는 염도가 낮다고 느껴진다. 혀가 이미 술로 달궈졌기 때문이다. 이때 매운맛을 더하는 선택은 쉬운데, 다음 날을 생각하면 기름의 입자 크기를 고민하는 편이 현명하다. 좁은 구경으로 고운 입자를 만든 향미유는 혀의 표면에서 오래 머문다. 반대로 굵직한 입자의 지방은 온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단단해져서 숟가락으로 쉽게 걷어낼 수 있다. 나는 매운맛이 부담스러운 동행과 함께라면, 매운 기름을 따로 달라고 부탁해 나눠 쓰는 쪽을 택한다.
면의 굵기도 변수다. 제주 라멘집들은 면 삶기 시간을 덜 공격적으로 받는 편인데, 밤엔 더 유연해진다. 바쁜 시간이 지난 뒤여서 오차가 커지는 게 아니라, 손님이 휴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푹 익은 면과 약간 더 두꺼운 차슈를 주문해도 눈총을 받지 않는다. 술자리를 이어가려면 국물은 3분의 1만 마시고, 나머지는 남겨 두는 것이 다음 코스를 위해 좋다. 배부른 상태로 사케바에 들어가면, 바텐더가 권하는 정교한 향이 낭비된다.
사케를 고르는 간단한 기준
술집에 들어갔을 때 병 라벨을 읽는 습관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정미율이 낮을수록 향이 화사하다고 막연히 믿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정미율 50%대의 긴조가 경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양조수의 미네랄, 효모의 발효 온도, 여과 방식이 결과를 갈라놓는다. 구도심 바의 셀렉션은 다품종 소량이 기본이라, 라벨보다 잔의 회전률을 확인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손님이 많은 날에는 드라이한 병이 재빨리 비고, 다음 병으로 넘어간다. 잔당 가격이 비슷하면, 방금 막 새로 딴 병에서 첫 잔을 받는 것이 안정적이다.
부어주는 온도도 중요하다. 8도 아래로 차게 내는 곳은 튀는 산미로 초반 재미를 준다. 그런데 제주 밤 공기는 해풍을 타고 습도가 높은 편이라, 잔의 표면에서 냄새가 다르게 맺힌다. 12도 내외가 향을 확인하고 음식과 결을 맞추기 좋은 타협점이다. 아주 드라이한 병은 15도 가까이 올리면 쓴맛이 둔해지고 포만감이 생긴다. 굳이 온도계를 들이댈 필요는 없지만, 첫 잔을 다 마시기 전에 잔을 잠깐 손에 쥐고 체온을 살짝 올려보면 미세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주당들의 시간표와 빈자리
제주의 금요일 밤은 예상보다 한산할 때가 있다. 서울처럼 야근 뒤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손님들이 몰리기보다, 저녁 8시 전후로 한 차례 붐비고 10시 이후 빠진다. 대신 토요일은 자정 이후가 바쁘다. 공항에서 마지막 편으로 들어온 여행자들이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찾기 때문이다. 구도심의 사케바는 자리 회전이 느리다. 2명 테이블 기준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을 잡는다. 바 카운터석은 혼자 온 사람에게 열려 있는데, 사장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거리라 주문과 추천이 빠르다. 새로 딴 병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잔을 받는 위치도 여기다.
빈자리를 잘 잡는 요령은 단순하다. 첫 집에 9시 30분 전에 도착해 1시간 안에 떠난다. 두 번째 집은 10시 40분에서 11시 사이에 입장한다. 세 번째 집은 새벽 0시 30분 전후. 이 시간표가 맞으면 새벽 2시에는 따뜻한 국물을 들고 숙소로 향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날에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거센 날에는 사람들이 한 곳에서 오래 머문다. 이런 날은 두 집으로 줄이고, 안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수월하다.
적당히 마시고 오래 걷는 기술
사케 투어는 술의 종류가 늘수록 체력이 먼저 닳는다. 기본은 잔과 잔 사이에 물을 한 잔씩 넣는 것이다. 가게에 따라 물맛이 다르다. 정수기 물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면 얼음을 두 개 넣어온 더운 물을 달라고 해도 좋다. 한 번 끓인 물은 입안에서 테닌처럼 거칠게 남은 맛을 정리한다. 껌이나 민트 사탕은 향을 뒤틀어 놓으니 피하는 편이 낫다.
걸음의 속도도 조절해야 한다. 10분을 쉬지 않고 걸어 다음 집으로 가는 대신, 5분마다 서너 걸음 속도를 줄이고 목을 돌린다. 해풍이 얼굴을 스칠 때 코로 길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는다. 알코올을 태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호흡이 정리되면 판단이 선명해진다. 새벽의 충동구매, 이를테면 필요 없는 추가 병 주문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
사케와 제주 안주의 호흡
제주 안주는 바다를 닮았다. 짠맛이 재료의 기본값으로 깔려 있다. 소금구이나 숙성 회뿐 아니라, 돼지고기에도 간장이 짙게 오른다. 이 위에 단맛이 강한 사케를 올리면 입안이 무거워진다. 대신 알코올 도수 15도 전후, 산미가 견고한 준마이로 염도를 똑바로 받쳐야 한다. 기름진 고등어구이는 약한 산도로는 버겁다. 반면, 감태나 톳무침 같이 향이 세지만 지방이 적은 안주에는 은은한 멜론향의 긴조가 꽤 잘 맞는다. 향과 향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튀김류는 변수가 많다. 밤에는 기름의 교체 주기가 늘어지기도 하고, 손님이 줄며 온도가 천천히 떨어진다. 바삭함이 줄면 단맛이 도드라져 사케의 단맛과 겹친다. 이럴 때는 차라리 발효감이 있는 쌀소주나 맥주로 방향을 꺾는 것도 방법이다. 사케 투어라고 해서 모든 잔이 사케일 필요는 없다. 빈틈을 만들어야 피로가 쌓이지 않는다.
퇴장용 국물, 정신을 붙드는 마지막 한 그릇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늘 비슷하다. 돼지국밥 혹은 고기국수 집. 구도심에는 24시간까지는 아니어도 새벽 2시 전까지 영업하는 곳이 여럿 있다. 이 시간의 국물은 역할이 분명하다. 몸을 눅여 숙면을 돕고, 다음 날의 후회를 줄인다. 내 경험상 국물의 염도는 낮게, 고기는 적당히, 면은 한 단 줄이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국물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3초 정도 혀를 눌러 본다. 짠맛이 바로 치고 올라오면 물을 조금 더 달라고 하거나, 밥을 반 공기 추가해서 나눠 넣는다. 국물의 밸런스는 개인의 취향이라지만, 술 뒤의 감각은 쉽게 속인다.
제주 돼지국밥은 부산식과 다르다. 내장보다는 살코기와 비계를 섞는 편이고, 깍두기 국물을 섞어먹는 손님도 많지 않다. 사케와의 밤 뒤에는 깍두기 대신 생양파와 고추를 조금 얹어 매운맛을 짧게 끝내는 편이 낫다. 간은 새우젓이 아닌 소금으로 한다. 젓갈의 풍미는 사케의 잔향을 망치기 쉬워서다.
초행자를 위한 짧은 체크리스트
- 소용량 병 위주로, 300ml 혹은 360ml 한 병씩 나누어 마신다. 첫 집은 21시 30분 전 입장, 두 번째는 22시 40분에서 23시, 세 번째는 0시 30분 전후로 맞춘다. 잔과 잔 사이 물 한 잔, 뜨거운 물도 좋다. 회보다 익힌 안주를 중심으로 시작해, 중반에 꼬치와 튀김, 마지막에 국물로 정리한다. 바람이 센 날에는 야외 잔 대신 실내 카운터석을 노린다.
피해야 할 오해 몇 가지
관광지의 심야 맛집은 늘 붐빈다고 생각하면 낭패다. 구도심은 주민과 여행자의 리듬이 섞여서, 평일 자정에 빈자리가 넉넉하고 토요일 자정에 줄이 생기기도 한다. 또 하나, 좋은 사케바는 병이 많을 것이라는 선입견. 병 수가 많을수록 관리 난도가 올라간다. 제주처럼 해풍과 기온 변동이 큰 지역에서는 적정량을 빨리 돌리는 집이 낫다. 마지막으로, 회가 많으니 생선만 먹어야 한다는 강박도 버리자. 오히려 돼지고기와 조개류가 사케의 속을 끌어올릴 때가 많다.
사장님과의 대화가 투어를 바꾼다
구도심에서 밤을 오래 보내다 보면, 메뉴판에 없는 한 접시가 나온다. 잔이 반쯤 내려갔을 때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 가게의 이야기가 담긴 작은 안주가 따라온다. 오래된 무김치, 반쯤 말린 도미 껍질, 전날 남은 명란의 탄탄멘 토핑. 이런 접시는 맛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가게가 얼마나 오랫동안 물건을 다뤄 왔는지, 어떤 순서로 손님을 이끌고 싶은지, 밤의 온도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대화가 알려 준다.
대화의 요령은 단순하다. 바쁜 시간에는 짧게, 여유로운 시간에는 두세 문장으로. "오늘 가장 빨리 비는 병이 뭐예요?" 같은 질문은 친절하다. 가게 입장에서는 재고를 관리하면서 손님에게 좋은 잔을 권할 수 있다. 반대로 "가장 비싼 거 주세요"는 제주 밤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격이 맛을 보증하지 않는다. 물류의 사정, 한 달 전 태풍으로 늦어진 입고, 예상보다 빠르게 지나간 손님 취향의 변곡점. 이런 것들이 병의 상태를 좌우한다.
비와 바람, 계절의 변수
제주 밤의 변수는 바람과 비, 그리고 체감온도다. 겨울에는 체감이 0도에 가깝게 떨어지는데, 실내에서 2시간을 보내고 나와도 몸이 금방 식는다. 이럴 때는 첫 집에서 따뜻한 사케 한 잔으로 몸을 풀고, 다음 집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아츠캉 수준의 뜨거움까지는 필요 없고, 누룩 향이 살짝 올라오는 40도 전후의 난온주면 충분하다. 반대로 여름 밤에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병을 잔에 부어 1분만 기다린다. 결로가 녹아내리며 잔의 온도가 맞춰진다.
비가 오는 날, 구도심의 작은 골목은 미끄럽다. 바닥이 물을 오래 머금는 구간이 있으니 건물 처마 밑으로 이동한다. 이 단순한 동선이 옷과 신발을 지킨다. 젖은 옷은 술맛을 떨어뜨린다. 실내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에서 손을 제대로 씻는 것도 중요하다. 초밥이나 꼬치를 손으로 집어 먹을 기회가 많다.
예산과 값어치
사케바 투어를 제주에서 하면, 서울보다 약간 저렴하거나 비슷한 수준을 기대하면 된다. 잔당 9천에서 1만 5천 원, 병은 대전휴게텔 3만에서 9만 원 사이가 대부분이다. 구도심의 가게는 과한 코르크 차지를 받지 않는다. 외부에서 사 온 병을 열어주는 문화는 드물지만, 구매처와 관계가 있는 경우 가끔 허용되기도 한다. 이때는 안주를 넉넉히 주문하는 것이 예의다.
맛의 값어치는 언제나 잔의 마지막 두 모금에서 판가름 난다. 처음에는 향으로 취하고, 중간에는 안주로 속도를 맞추고, 마지막에는 균형이 말해 준다. 잔을 비우기 직전에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남은 술을 천천히 굴려 본다. 혀의 옆면에서 쓴맛이 과하게 남으면 다음 잔을 낮은 도수로 조정하고, 혀의 중앙에서 단맛이 끈적하게 붙으면 안주를 바꾸자. 심야 투어는 조정의 예술이다.
동행과 솔로, 다른 리듬
둘 이상이 움직이면 병을 나눌 수 있어 선택폭이 넓다. 페어링의 실패도 나눠 가진다. 대신 이동이 느려지고, 합의에 시간이 든다. 혼자라면 카운터에서 바텐더와 대화를 더 자주 할 수 있고, 작은 접시를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다. 단점은 배부름의 경계가 빨리 온다는 것. 솔로 투어에서는 반 접시 주문이 가능한 집을 위주로 골라야 한다. 구도심에는 반 접시 문화가 자리 잡아 가는 중이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마무리, 제주 밤이 남기는 것
제주의 구도심은 천천히 변한다. 새로 열린 가게가 달마다 생기고, 사라지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밤의 리듬, 즉 9시 이후의 사람들이 찾는 온기와 간, 소리의 세기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 리듬을 이해하면 가게 리스트가 바뀌어도 좋은 밤을 만들 수 있다. 사케는 그 리듬을 세밀하게 보정하는 도구다. 바람이 세면 향을 줄이고, 비가 오면 온도를 올리고, 동행의 기분이 가라앉으면 한 잔을 달게 한다. 술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조절 장치라는 사실을 밤마다 새로 배운다.
새벽 2시, 마지막 국물을 들이키고 나오는 길. 탑동의 바람이 조금 잦아들고, 동문시장 셔터 위로 약한 불이 다시 켜진다. 도시가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는 시간에, 우리는 천천히 숙소로 걸어간다. 다음 밤에도 이 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같은 길이지만 다른 잔, 다른 바람, 다른 대화가 기다린다. 제주 구도심의 심야는 그렇게, 반복되지만 지루하지 않다. 맛이 기억을 붙들고, 기억이 다시 길을 만든다.